논문명 |
조선왕실의 정침(正寢) 개념과 변동 / JeongChim of Joseon Dynasty and its Conceptual Alteration |
저자명 |
조재모(Cho Jae-Mo) |
발행사 |
대한건축학회 |
수록사항 |
대한건축학회논문집 계획계, v.20 n.6 (2004-06) |
페이지 |
시작페이지(191) 총페이지(8) |
ISSN |
12269093 |
주제분류 |
역사 |
주제어 |
正寢 ; 便殿 ; 寢殿 ; 儀禮 ; 生活慣習 ; 溫突//JeongChim ; Royal office ; Royal residence ; rituals ; customary life-style ; floor-heating system |
요약1 |
정침은 주인의 모든 행동이 시작하고 끝나는 일상적인 연거의 공간이며 각종 대소사를 행하고 최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의식적인 공간이다. 유교적인 개념 속에서 정침은 하나의 건축형식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건축군 전체 배치 상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요소였다. 정침의 기능과 위상은 항상 지속되지만 그 건축형식은 생활관습과 건축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國朝五禮儀와 같은 의례를 기준으로 볼 때 조선시대의 궁궐 정침은 편전이었다. 그러나 일상적 연거의 공간은 침전을 사용하고 있어 정침의 기능이 양분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의 전통적인 생활관습이 중국 고대의 건축공간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며, 특히 편전에 온돌이 없다는 사실은 연거와 의식공간이 분리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궁궐 내의 온돌사용이 확산되고 의례의 엄밀함이 완화되면서 편전, 즉 의식적 정침의 기능이 다른 공간으로 이전되기 시작하였다. 선정전, 문정전 등의 편전에는 廳과 房의 공간적 구획이 없어 ‘還內’의 동선을 상정할 수 없었으며, 상참이 형식화하여 경연과 소대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희정당과 같은 야대청의 중요성이 커졌다. 정침의 중요한 의식적 기능인 昇遐禮가 연거의 공간인 침전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점은 정침으로서의 편전의 존재근거를 흔들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정침의 개념은 침전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의례중심의 중세적 사고는 현실과 편리를 위주로 변경될 수 밖에 없었다. |
요약2 |
JeongChim is the usual residence and also formal place for some rituals such as wedding ceremony, national council and King's demise. As time goes by, its dignity and function had been kept up persistently but forms, influenced by life-style and constructional conditions, were molded so diversely. At Joseon Dynasty, Pyeonjeon had the meaning of JeongChim as ritual place though King's residential place was ChimJeon. It means that the functions of JeongChim were divided into two parts because the traditional life- style of Joseon using floor-heating system differed from that of the ancient China. In line with the spreading of Ondol and looseness of rituals, some roles of PyeonJeon had transferred to other buildings. 'Returning to the inner place' cound not be set in SunJeongJeon because there wasn't any separated room-type space. Moreover the night-meeting hall had got leading role for unofficial audience instead of PyeonJeon. And the ritual for King's demise had never held at PyeonJeon. These aspects had weakened its reason for being. The bisected JeongChim was getting combined to ChimJeon and ritual- oriented spatial system had started to decline giving way to pr |
소장처 |
대한건축학회 |